생년월일: 1979生

이제, 나만의 꿈을 향해 달린다

  -위아 떠난 김영복 씨의 ‘홀로서기’

2008년 11월 2일. 중앙마라톤대회가 열리던 날 뇌출혈로 한 달 여 투병생활을 하던 한 기업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10km 코스 참가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 부문 1~3위를 휩쓴 선수들이 근처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쯤 비보가 전해졌다. 10km 입상자들은 모두 ‘위아’ 소속이었고 비보의 주인공은 위아 김평기 부회장이었다.

회사 이름을 걸고 실업 팀이 아닌 아마추어 마라톤 팀을 운영하며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었던 위아는 그렇게 사라졌다. 젊은 아마추어 톱클래스 선수들의 집합소, 회사 업무보다 마라톤 성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집단, ‘마라톤 왕국’으로까지 불렸던 위아는 마라톤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김평기 부회장이 별세하면서 장수를 잃은 군대처럼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1년, 제법 이름 있는 대회마다 출발선을 노란색 유니폼으로 장식하던 위아 선수들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됐다. 아프리카 브룬디 출신으로 국내 마스터스 최고기록(2:18:39)을 보유한 부싱고 도나티엔을 제외하곤 ‘선수’들이 모두 회사를 떠난 것이다.

작년 동아마라톤에서 자신의 최고기록(2시간 26분 55초)을 세우며 마스터스 정상을 노렸던 김영복(31)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원한 동반자이자 러닝 파트너인 아내와 함께 러닝화 끈을 더욱 단단히 동여매는 중이다

복싱, 근대5종, 장애물, 경보… 그리고 마라톤
김영복 씨는 교교시절 육상부 경험이 있는 이른바 ‘선수 출신’ 아마추어다. 물론 선수로서 달리기를 했던 기간은 1년이 조금 넘는 정도지만 말이다. 어려서 몸이 약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달리기 운동을 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 지도자 없이 ‘나름대로’ 훈련하다 보니 진학에 필요한 성적을 낼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3학년 때 복싱으로 종목을 바꿔 충남체고에 들어갔다.

“어… 그런데 선배들이 군기 잡는 걸 보니 기가 팍 질려버리더라고요.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근대5종(사격, 팬싱, 수영, 승마, 크로스컨트리) 팀이 생기는 바람에 그쪽으로 들어갔죠. 꽤 열심히 해서 전국대회 10위권 내에 들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중장거리 담당 선생님의 권유로 종목을 바꿔 육상을 시작했다. 뒤늦게 뛰어들었음에도 1997년 전국종별선수권대회 3000m 장애물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성공적인 종목 전향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장애물 경기 훈련을 하다가 착지를 잘 못 하는 바람에 무릎 연골을 크게 다쳤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긴 슬럼프가 시작했다.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다른 선수들은 대학과 실업 팀을 물색했지만 그는 은퇴를 생각해야 했다.

결국 체육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으로 충북대학교에 진학했고, 이번엔 경보선수로 변신을 꾀했다. 그러나 특기자가 아닌 탓에 등록금 지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휴학해서 등록금을 벌어 복학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결국 3학년 때 군 입대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육상선수의 꿈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마스터스로 변신, 신동역을 이겨라

군 입대 말고는 마땅한 진로가 없어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고향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위아라는 회사가 있는데, 거기 들어가면 운동도 할 수 있고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특례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김영복 씨는 그길로 짐을 싸 창원으로 내려갔다.

“당시엔 위아라는 회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무적정 간 거예요. 김평기 부회장님과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왜 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여려서부터 달리기가 좋았고, 지금도 좋다고 대답한 것 같아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2때 어머니도 잃고, 선수가 돼서는 무릎이 고장난 얘기까지 털어놓았죠.”

김평기 부회장으로부터 “내가 당신을 한 번 믿게 해달라”는 대답을 듣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뜻인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뜻밖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2003년 1월 그는 다시 한 번 종목을 바꿔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됐다.

위아 입사가 결정되면 열심히 일하며 즐겁게 운동하는 일만 남았다고 여겼는데 그에게 미션이 떨어졌다. 당시 마스터스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회사 동료 신동역 씨를 이기라는 거였다. ‘당신을 믿게 해달라’는 말은 일단 들어와서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라는 뜻이었다.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신동역을 넘는 것도, 마스터스 1위 기록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실패하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불같이 훈련에 매달렸다. 하루 5시간만 자고 남는 시간은 전부 훈련하는 데 투자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열린 동아마라톤에서 김영복 씨는 2시간 33분대로 가능성을 보인 후 6월 환경마라톤대회에서 신동역 씨를 제치고 2시간 28분 39초를 작성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기록에서 앞선 것은 아님. 신동역 씨는 2003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26분 13초를 작성)

그렇게 첫해 좋은 성적을 내면서 위아에 안착했지만 늘 동료들과 기록 경쟁을 해야 하는 부담감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선수’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아마추어 고수의 요람, 총성 없는 전쟁터
처음 신동역 씨를 이길 때만 해도 그의 앞길에 장애물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하나 둘 마라톤 고수들이 새로 입사하면서 그는 경쟁에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용택이, 동길이 형이 들어오고 부터였을 겁니다. 실력이 엇비슷하니까 질 거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그런데 시합에 나가 한 사람 한 사람 밀리다 보니까 나중엔 10명 중에서 꼴찌더군요. 연습 때는 잘 뛰다가 정작 시합에 나가 뒤떨어지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기나긴 슬럼프가 시작됐다. 훈련을 아무리 해도 늘기는 커녕 더 나빠지는 것만 같았다. 몇 년 뒤에야 깨달은 실패 요인은 자신만의 훈련이 없었다는 거였다. 김영복 씨는 그때까지 그 날 그 날 컨디션에 맞는 선수와 연습했다. 오늘은 김용택 씨가, 내일은 이동길 씨가 훈련 파트너인 셈이었다. 남의 스케줄에 따라 마구잡이로 훈련하다 보니 정작 훈련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과훈련을 한 것이다. 게다가 파트너들처럼 대학이나 실업 팀에서 체계적으로 만든 몸도 아니었다. 그러니 훈련이 잘 된 듯싶다가도 시합에 나가면 맥을 못 추는 일이 반복됐던 것이었다.

마라톤 실력을 인정받아 입사한 만큼 위아의 러너들에겐 마라톤 기록이 업무능력보다 더 중요한 평가기준이었다. ‘등수 안에 못 들거나 기록이 안 좋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할 만큼 기록 중심으로 대우가 달랐다. 심지어 성적이 안 좋으면 월급이 깎이기도 했다. 못 뛰는 사람의 월급을 거둬들여 잘 뛰는 사람에게 몰아주는 식이었다. 결국 그런 방식을 못 버티고 하나 둘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는 김용택, 도나티엔 씨와 함께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그래도 기록이 좋아지지 않자 산업특례기간이 끝나던 2006년 위스코라는 현대의 조그만 협력업체로 전출되기에 이르렀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의 ‘좌천’이었는데, 그 뒤로도 기록이 들쭉날쭉 하니가 계속 위스코에 머물게 된 거죠. 3년간 열심히 뛰고 나서 작년에 위아로 복귀하려는데 부회장님이 별세하신 겁니다.”

김평기 부회장의 존재는 주위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위아를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자 ‘선수’들에겐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주야 2교대로 일하면서 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일을 해야 했다. 돈은 벌 수 있을지 모르나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김영복 씨는 결국 7년간 정들었던 위아에서 미련 없이 나와버렸다.

마라톤이 맺어준 사랑
김영복 씨의 아내 오정희 씨는, 코오롱과 삼성전자 등 마라톤 명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국가대표까지 지낸 그 오정희 선수가 맞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오정희 선수가 3대 메이저대회(동아, 춘천, 중앙)를 석권하던 전성기에 시작됐다.

“2002년 중앙서울마라톤 중계를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이 여자다 싶어 다음해 용기를 내서 다가섰습니다. 미안하죠. 저를 택하면서 모든 걸 버린 셈이 됐거든요. 지금 소속되어 있는 창원시청에선 혼자 운동해요. 결혼을 안했으면 아직도 국가대표를 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우린 만족해요. 결혼하고 나서 같이 운동하며 서로를 도와주고 받쳐주니까 오히려 기록도 더 좋아지더라고요.”

사실 그는 2005년 결혼 이후 매년 동아마라톤에서 20분대의 기록을 내며 꾸준히 실력을 키우고 있다. 한편으론 자신을 믿고 따라준 아내의 운동을 위해 코치 역할을 하기도 한다.지자체가 운영하는 팀은 충분한 코칭스태프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 아무래도 남자가 훈련 파트너가 되면 낫겠다는 생각에 같이 운동을 배우며 훈련을 지원하는 중이다.

그 덕분인지 오정희 선수는 올해 전국체전 1500m에서 4위(4:45), 하프마라톤에서 5위(1:14:27)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냈다. 특히 생소한 중거리에서 입상한 점은 육상 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김영복 씨도 틈틈이 대회에 참가한다. 예전 위아시절이면 절대 참가하지 못했을 다양한 대회에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10월 24일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 대회에는 모 브랜드의 요청으로 구두를 신고 달리는 이벤트도 벌였다.